김민경 MinKyoung Kim
mineh.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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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map : SONGDO, 2010 [kor/eng]
환상과 더불어 살기 : 88만원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 [kor]
[큐레이터조선령의상상공장] 풍경의 정물화 the still-life of a scene [kor]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 Objects that we brought from In-cheon china town [kor/eng]
김민경, 인간을 탐험하는 가짜 여행 책 [kor]

updated on August 2010
김장프랙티스!!, tourmap : SONGDO, 2010
관광 안내지도

<유령 the invisible> 의 출판부분과 협력한 tourmap : SONGDO 는 송도국제도시 건설현장 답사를 기반으로 21세기 이후 신도시의 형성기반과 구/신도심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도시문화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했다.
tourmap : SONGDO 는 개발지향, 목적지향으로서의 송도 국제 신도시의 모토가 마치 소실점으로 회귀하는 근대 권력과 유사함에 집중했다. 송도 국제 신도시에는 거대한 행정적 지휘통솔과 경제적 논리에 경도된 소시민들의 열망이 더해져 있다. 이러한 욕망, 권력, 자본 등과 같은 개념은 상징적으로 혹은 복잡한 이데올로기와 함께 이해되었다. 하지만 송도국제신도시는 마치 그 모든 추상적인 단어가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현실의 삶 속에 정착한 듯하다. 감히 실체를 드러낼 수 없었던, 드러내지 않았던 것들이 거대한 도시풍경을 이루었다.
tourmap : SONGDO는 건설현장을 지금 이곳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성으로 보고 이를 안내하는 투어맵이다. 건축물의 철제 골격과 대형 크레인, 공사 가림막, 지반공사 등으로 펼쳐진 풍경은 메트로폴리탄이나 한국 신도시 교외의 어느 곳과도 다른 스카이라인을 갖는다.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변하는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가 시차에서 오는 가변적이고도 가상적인 선이다. 따라서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스카이라인이 존재한다. tourmap : SONGDO 는 송도 국제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확인할 수 있는 ‘그 곳’ 을 찾도록 안내한다.
그런데 ‘그 곳’ 은 앞서 언급한 소실점과 같이 그 자리에서 서도록 강요되는 ‘지점’이다. 홍보용 송도국제청사진처럼 송도를 바로 보기 위해서 청사진을 찍던 위치에서 봐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tourmap : SONGDO에 제시된 12개의 스카이라인을 확인하려면 송도 국제 신도시의 공사현장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그 여정을 이끄는 것이 tour map : SONGDO 이며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기도 하고, 송도 국제 신도시를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이정표이다.


KimChang Practice!!, tourmap: SONGDO, 2010
tour map

As a collaborative project with the publishing section of “the invisible”, tourmap: SONGDO is built upon a field study of construction sites in New Songdo City to investigate the basis of ‘new city’ formation, the historical context of old and new downtowns and the flux of urban culture.
tourmap: SONGDO focused on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development-oriented and purpose-driven mottos of New Songdo City and the modern power that returns to vanishing point. In New Songdo City, on top of an immense magnitude of administrative control, there are aspirations of the petit bourgeois overwhelmed by economic logic.
Concepts such as desire, power and capital were either understood symbolically, or in relation to complex ideologies. And yet, in New Songdo City all these abstract words seem to materialize in real life as a gigantic civil engineering project. Things that did not and could not reveal themselves formed a gigantic urban landscape.
tourmap: SONGDO is a tour map that guides visitors around the construction sites in New Songdo City, regarding them as one of the characteristic features that vigorously reveal the ‘here and now’ of the city. The landscape, which is full of iron structures of buildings and huge cranes, construction screens, and geotechnical construction, creates a skyline distinctively different from that of a metropolitan city, or anywhere else in the suburbs of new cities in Korea. The skyline changes according to the position of the observer, a virtual line that derives from the difference in perspectives. Likewise, the diversity of skylines corresponds to the diverse positions of the observer. tourmap: SONGDO leads the way to ‘the place’ where the New Songdo City skyline can be identified.
This ‘place,’ however, is a ‘spot’ where the observer is forced to stand, much like the vanishing point mentioned earlier. Indeed, to see New Songdo City in just the same way as in the promotional New Songdo City blueprint, the viewer has to be at the exact spot where the photographer took the picture for the blueprint. To verify all 12 skylines presented in tourmap: Songdo, visitors to New Songdo City need to look all over the construction sites. As a guide map of this itinerary, tourmap: SONGDO is a sort of a game, road signs that suggest one possible way to experience the city.


- 김장프랙티스!!, KimChangPractice!!, 2010
환상과 더불어 살기 : 88만원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

독일 적군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바더 마인호프]를 무척 보고 싶었는데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아직 보지 못했다. 봤더라면 할 이야기가 더 많았을 것 같아서 조금 아쉽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영화에 대한 평이 아니라 이 영화의 개봉 자체가 무척 징후적이라는 소감이다. (그러니까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영화냐고!) 몇 년 전 베를린에 출장을 갔을 때, 역시 적군파를 다룬 전시 [테러의 표상 – RAF 전시]를 보고 적군파의 존재는 독일 역사의 강렬한 트라우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영화 소식을 접하면서 그때의 감상이 되살아났다. 지금은 그것이 단지 ‘독일’의 트라우마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층 더 거기에 필연성을 부여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내가 즐겨 읽는 모 영화잡지의 모 칼럼에서 이 영화에 대해 연민의 시선이 담긴 구절을 접했다. 이분은 “왜 저렇게들 유연하지 못했을까 왜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을까”라고 쓰면서 적군파들의 행동을 ‘지나간 그때 그 시절의 가치관’이라고 보시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테러를 통해 국가권력과 가진자들에게 도전하겠다는 적군파의 행동은 상당히 업데이트한, 탈근대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범죄를 통해서만 범죄에 도전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황은 자기가 속한 세상과 자기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타자에 대항하는 길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자가당착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맥루한-보드리야르-비릴리오 계보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대로 말하자면) 더 이상 ‘외파’가 불가능하고 ‘내파’만이 가능하다는 그 매우 포스트모던한 경우 아니었을까?

슬라보예 지젝의 논리를 빌어 이 상황을 좀 더 논해보자.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회의 합리성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합리성 바깥의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믿음을 더 강하게 가진다. 그런 세상의 존재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의 비존재성을 믿는다. 우리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문장 속으로 도피한다.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바깥’은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적군파가 한 일은 이 바깥에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 바깥을 삭제 혹은 말소시킴으로써가 아니라(다시 말해 환상을 부정하고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그 바깥을 향해 돌진함으로써 그렇게 했다(다시 말해 환상이 제시하는 ‘훼이크’한 조건 – 당신이 자본가들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다 – 을 글자 그대로 믿고 글자 그대로 실현함으로써). 그들은 환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글자 그대로 믿어버림으로써 선택의 자유라는 말 근저에 뿌리박힌 부자유의 구조(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타자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바로 그 때문에 ‘단지 환상 속에서’ 그 바깥을 꿈꾼다. 하지만 적군파의 자멸적인 테러는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던 이 바깥을 현실화해버렸다. 이를 통해 그들은 현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끝없이 유보되어야만 했던 이 바깥의 정체(그것은 진정한 바깥이 아니라 단지 ‘안’이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어떤 유보조건에 불과하다는 것)를 역설적으로 폭로해버렸다.

2009년의 대한민국은 1970년대의 독일과 다르지 않다. 얼핏 보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정권은 탈근대적이기기는커녕 전근대적인 정권이 아닌가? 하지만 국민은 이미 탈근대적인 국민이다. 이 두 가지 사이의 간극 그 자체가 탈근대적이다. 지금 이 상황은 청산되지 못한 ‘근대성의 부채’가 유령처럼 탈근대사회 속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떠안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그것을 계속 갚아나가야 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적군파 역시 독일의 역사가 청산하지 못했던 빚의 독촉장이었을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이라고 불렀던 이 외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자칫 우리가 적군파처럼 될까봐 매우 조심하면서 살고 있다. 알렌카 주판치치가 [실재의 윤리]에서 썼던 표현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고 있다.” 환상의 실현(예컨대 테러나 범죄)은 환상의 은밀한 목적(대타자의 완전성을 복원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2009년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정치적 행위가 있다면, 이 ‘환상의 실현’과 관련된 행위일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구조를 폭로하고 그것의 안정성에 도전하는 것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며 말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상징적 동일시(법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환상의 수준에도 존재한다. 우리 자신의 환상과 대면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적군파처럼 자멸하지 않고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환상이 현실화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현실적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최근 전시장에서 접한 몇몇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거기에 대한 답은 아니더라도 어떤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조금 후에 이야기할 조현택, 이상현, 김민경-장윤주의 작업이 그것이다. 얼핏 적군파와 이들은 관계없어 보인다. 이들은 테러나 폭력을 다루고 있지도 않으며, 민족이니 국가니 혁명이니 하는 거창한 범주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의 작업은 소소한 일상이나 개인적인 관심사를 다루면서 비교적 평온한 감정을 이끌어내며, 그런 점에서 확실히 비장함이 탈각된 21세기의 문화에 속한다. 또한 이들은 아직 작가 경력의 시작점에 서 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이다) 지금까지 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욱 많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리뷰를 하는 것도 무리이다. 다만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들의 작업 속에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시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흔히 88만원 세대라고 불려지는 이 새로운 세대는 정치적 의식이 없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도 분명 있다는 것,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이들의 작업은 보여준다.

예컨대 조현택(개인전[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2009. 6.23 – 7.10, 대안공간 풀)의 사진작업을 한번 보자. 이 작업들은 작가가 어린시절을 보낸 전라도 나주 지역의 중학생들을 등장시킨 일종의 연출사진이다. 작가는 일단 콘티를 짜고 설정을 한 뒤 중학생들을 섭외하여 모델로 기용했다. 얼핏 보면 소년시절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사진들에서 어린 중학생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일종의 흉내내기인데, 이 흉내내기는 어떤 의식적인 모방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화된 어떤 문화적 코드,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초적 폭력성과 가부장적 문화의 코드들이다. 장면들은 대체로 조폭, 불량학생, 운동선수, 폭주족 등 ‘마초’ 혹은 ‘수컷’의 집단문화와 관련된 것들이며, ‘어디선가 많이 본’ 영화의 장면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좁고 허름한 여관방처럼 보이는 실내에서 다섯 명의 소년들이 모여있는 사진을 보자. 보스처럼 보이는 소년이 의자에 길게 누워있고, 나머지는 군기가 들어간 자세를 하고 무릎을 꿇고 있거나 불에 달군 꼬챙이로 문신을 새기고 있다. 사실상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 있는 자세는 섬찟하기까지 한데, 중학생밖에 안되는 어린 소년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나 이 장면 자체가 향수어린 시선으로 세팅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얼핏 귀엽다는 느낌이 앞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년들이 귀엽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한참 누나뻘로 보이는 여자와 정사를 벌인 직후의 장면을 연출한 [여대생과의 정사]도 마찬가지이다. 침대 머리맡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어린 소년과 뒤편에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는 성인 여자의 대조(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 이것과는 상황이 정반대였을 듯?)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거북하게 느껴진다.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를 명백히 패러디한 것처럼 보이는,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는 흉내를 내는 소년이 등장하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햇볕에 새카맣게 탄 채 즐겁게 이 놀이를 하고 있는 시골소년의 귀여움과, 그가 하고 있는 행위의 섬찟함 사이에서 이상한 간격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 장면들은 사진의 모델인 현재 중학생들의 실제 놀이문화도 아니고 작가의 과거도 아니다. 이렇게 놀았다고 보기엔 작가의 나이가 너무 젊을 뿐 아니라 이 흉내내기 놀이의 은근한 작위성과 과도함은 현실이 아님을 암시한다. 이런 어긋남 혹은 간격은 시간적인 것이기도 하고 공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선 시간적으로는, 우선 작가 자신의 중학생 시절과 지금 중학생들 사이의 간격이 있다. 작가도 작가노트에서 지적했듯이, 요즘 중학생들은 이러고 놀지 않는다. 그들은 들로 산으로 쏘다니면서 마초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피씨방이나 학원에 가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진을 보는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이들이 실제로 이러고 논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음으로는, 작가가 실제 경험했던 과거 청소년들의 놀이문화와 그것을 연출화한 현재의 시선(다분히 향수어린) 사이의 간격이다. 고등학생이면 어른 흉내를 내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겠지만, 중학생들은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내어도 전혀 어른 같지가 않다. 이들은 아무리 ‘오토바이 폭주족’이 되려고 애써도 자전거타는 동네 어린애들로 보이는 것이다. 중학생 모델의 앙상한 팔뚝과 젖살이 덜 빠진 얼굴들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마초적 행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돌아다니는 허름한 시골 동네나 여관방과, 그들이 흉내내는 장면들의 ‘멋지구리한 아우라’간의 간격도 있다.

결국 이 장면들의 우스꽝스러움과 간격은 여러 가지 시공간적 자료를 마구 뒤섞은 결과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환상의 필터가 작동하는 지점은 이 장면 자체라기보다는 이 장면을 만들어낸 작가 자신의 시선(2009년의 20대이기도 하고, 과거의 어떤 시점의 중학생이기도 하며, 성인남자이기도 하고, 소년이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그 모든 성격의 복합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다큐메터리 작업을 2년간 해봤으나 사진이 더 이상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과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으며 “스스로의 자위행위로서의 작업이 아닌 작업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사실 연출사진은 한때 급속도로 유행하다가 그 기법 자체가 상투화되면서 시들해져버린 방식이기도 하다. 조현택의 사진이 그 상투화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사진들이 개인적 삶이 사실은 코드화된 삶이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이는 이미 다양한 연출사진들이 이미 해왔던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사진 속의 소년들은 단지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으며, 작가 자신도 이 작업을 통해 개인적 즐거움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사실 ‘길티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남성적 마초문화의 상투형을 내면화하는 것이 이 즐거움과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워하는 자신에게 죄의식이 느껴진다. (결국 이 순진했던 소년들이 조폭이 되고, 부하를 괴롭히는 상사가 되고, 뇌물 받아먹는 정치인이 되고…이런 상상을 해보라) 그래서 핵심은 이 사진에 대해 작가 자신과 모델들, 관객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허위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이라는 데 있다. 그것이 단순히 허위적 즐거움이라면 즐기기를 그만두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하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는 작가 자신의 향수어린 시선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핵심이다. 가장 개인적인 만족의 행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비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죄의식은 환상의 실현이 어째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현실로 접근하는 통로인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상현(개인전 [나는 언젠가 리움에서 회고전을 가지는게 꿈입니다], 2009.7.14-7.31, 대안공간 풀)의 경우도 ‘현실에 접근하는 통로로서의 환상’을 다룬다. 다만 이 경우 방향은 반대이다. 스스로를 냉소하지 않고서는 비판의 지점에 다가갈 수 없는 자기분열적 상황은 이번에는 결과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주어진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자본주의와 대기업의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 대기업 삼성에서 20년간 일했던 아버지와 거기서 나온 돈으로 살아온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있다. 평생 충성을 다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에 다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를 작가는 연민과 씁쓸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삼성에서 대준 학자금으로 학교를 다닌 자신과 형제들, 삼성에서 건설하는 재건축 아파트에 살게 될 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이 분열과 불편함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오타쿠 문화. 속칭 ‘모에’ 문화의 차용이다. 그는 현실을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고 현실의 자료들을 2차 창작물의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한다. 작가는 [삼성과 나]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삼성’에 얽힌 이야기들을 그래프, 드로잉, 사진, 통계표 등으로 재가공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현실을 허구화하고자 한다. 즉 견고한 현실을 가변적인 게임의 재료로 재창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행위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이 행위는 도피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중의 ‘잘 알고 있음’은 단순한 도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실을 허구화하는 전략은 속칭 ‘잠입액션’이라고 불리는 컴퓨터 게임과 연관이 있다. 작가 자신이 차용했다고 말하는 게임은 ‘메탈기어 솔리드’이다. 이 게임에는 대규모 폭발이나 대형 전투가 등장하지 않으며 대신 적진에 인질로 잡힌 우리 편을 구해내기 위해 적의 기지에 몰래 잠입하는 설정이 있다. 중요한 것은, ‘비밀리에’ ‘잠입’한다는 것이다. 적의 기지를 파괴하면 인질도(그리고 거기 들어간 자기 자신도) 죽는다. 이 딜레마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탈근대사회의 딜레마, 즉 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와 매우 유사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몰래 기지에 접근해서 인질을 빼내오는 것이다. 작가가 작업 속에 게임 화면을 직접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게임적인 방법으로 재료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이와 관련된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게임의 감각적 화면과는 대조적으로 건조한 자료들, 즉 청사진 도면, 드로잉, 문서, 숫자, 기계 등이 있다. 이것들은 한편으로는 분명 명확한 객관적 자료들(레미안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빌린 융자금 액수와 이자율이라던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지점에서 허구적인 게임의 자료로 변형된다.

이런 전략은 [삼성과 나]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근대사의 트라우마들을 소재로 한 가공의 이야기 [서울특별시 전 방위 방어 요격 시스템(가칭) 조사 보고서]에서 좀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html 문서, 청사진, 조직도, 도면, 위성사진, 기계 공작물 등등의 장치를 통해 작가는 서울 시청이 유사시 적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한 미사일 요격본부라는 ‘극비사실’을 그럴듯한 모양새로 만들어서 보여준다. 시청 건물이 유사시 거대 로봇으로 변환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다던가, 시청 지하에 대 테러 전략 시설 담당실과 핵 보존동, 격납고, 무기고, 주군지 등이 있다거나, 국회 의사당에 미사일 기지가 있다거나, 시청 지하본부가 무력화되면 남산터널이 대신 임무를 수행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관객이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볼 수 있는, ‘전시에는 소각을 요하는’ 1급 기밀문서의 표지에는 “이 문서는 국가 안전 보장에 관한 필요 불가결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mj-12 클리어런스 레벨을 소유하는 자 이외의 취급을 엄중히 금지한다”라는 그럴듯한 문구가 쓰여 있다. 제공된 힌트에 따라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 문서를 복사한 느낌이 들도록 의도적으로 비뚤게 배치된 문서들이 나타나는데, 실감을 더하기 위해 검은 매직으로 삭제한 부분, 메모와 낙서 등을 첨가해놓았다. 또한 이런 허구적 이야기를 실제 역사적 사건과 엮어놓음으로써 그럴듯한 느낌을 더했다. 문서에 따르면 이 특급비밀전략과 관련된 실제 사건으로 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78년 KAL기 피격사건, 1979년 김형욱 실종과 10. 26, 1991년 노태우-고르바초프 회동 등이 있다. 또한 ‘더블 스피커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어서, 비밀요원들에게 암호를 전달하기 위해 유행가 가사를 이용한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가슴’이라는 단어는 ‘언론조작’을, ‘그대’라는 단어는 ‘주요인물 납치’를 의미한다는 식이다. 관객이 직접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전시장에 아이팟을 배치했는데, 들어보면 그야말로 평범한 노래들이다. 하지만 ‘더블 스피커 시스템’에 대한 설명 덕분에 노래를 듣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서울특별시…]가 제시하는 세계는 사실 특이한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음모이론의 세계이다. 실제로 각종 음모가 횡행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음모론의 설득력은 매우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해왔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음모인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듯이, 음모론 그 자체는 사실 편집증적 망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음모론의 진실은, 망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 있다. 이상현이 만든 자료나 문서들은 사실 매우 엉성해서, 그렇게 ‘진짜’ 같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의 결함은 아니다. 이상현의 내러티브 게임이 재미있는 지점은, 그것이 현실을 허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꾸로 허구를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모에 문화’는 아무리 엄숙하고 비장한 원본이라도 2차 창작물 속에서는 우스꽝스럽게 바꾸어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본의 비장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에 문화가 보여주는 것은, 모에 행위 그 자체의 비장함이다. 즉 모에 문화는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현실적 힘을 행사하는가를 증명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음모론이 허구라는 사실은 그것이 갖는 현실적 힘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허구가 현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 그것은 이미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서울특별시…]는 현대사의 트라우마들을 가벼운 허구로 바꿈으로써 거꾸로 허구의 무거운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기본 설정에 있어서는 의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김민경-장윤주의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인천여성비엔날레, 2009.8.1-8.31)은 타자를 보는 시선의 문제를 통해 ‘환상과 더불어 살기’에 접근하고 있다. 이 작업은 인천 차이나타운이라는, 우리 옆에 오랫동안 존재해왔지만 거기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한 적이 거의 없었던 어떤 공간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들이 리써치해서 쓴 텍스트가 담고 있는 내용처럼,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대사의 정치적 트라우마가 결집되어 있는 곳 중 하나로(작가들의 글에 따르면, 한국 화교의 99퍼센트가 산둥성, 즉 대륙 출신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망명자들이었다. 한국 사회의 화교차별에 시달리면서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지도 못하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온 화교들은 9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의 수교 및 타이완의 본토화 경향 이후 또 다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냉전과 전쟁의 역사, 글로벌리제이션, 다문화와 디아스포라의 문제 등 복잡한 정치학이 혼종된 공간이다. 이곳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적산가옥들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 있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옛 동네이기도 하다. ‘한중문화관’이라는 다소 키치적이고 과장된 스타일의 새 건물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래된 집들과 가동을 멈춘 제분공장(최근 이 공장은 ‘인천아트플랫폼’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맛없는) 중국음식점들이다.

김민경-장윤주가 이 지역을 다루는 방식은 사실관계를 파고드는 연구나 고발성 다큐 같은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작업을 시작한 의도 자체는 상당히 묵직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작가노트에 따르면, 이 작업의 의도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정치ㆍ문화적 지형도를 되짚어보며 미술로서 이에 대한 순환적 이해를 도모하는 프로그램의 취지하에, 한국이라는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비주류 민족으로서 혼재된 정체성을 지닌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가볍게 산책하는 느낌으로 이 지역을 거닐면서 몇몇 물건들을 수집하고 풍경을 사진찍어 제목 그대로 차이나타운에 대한 ‘정물화’를 만든다. 정물화는 ‘still life’라는 영어 제목처럼 정지된 생명, 그러니까 생생한 원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박제된 인공적 세계를 구성하는 작업이다. (심지어 정물화는 프랑스어로는 nature morte, 즉 ‘죽은 자연’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물건(길에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서 글자 그대로의 정물화를 그리고 같은 배치를 사진으로 찍어 엽서로 만들어 전시장에 비치했다. 또한 차이나타운 풍경 사진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상영한다. 3대의 슬라이드는 조형적 고려를 통해 배치된 서로 다른 사각형의 영상을 투사하는데, 이 배치 그 자체가 정물화라는 느낌을 강화시킨다. 한 개의 슬라이드는 글자 그대로 정물화처럼 움직이지 않는 영상이며 다른 두 개는 시차를 두고 바뀐다. 이 슬라이드 사진들은 차이나타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곳에 대한 주관적 기억이며 조각 조각 떼어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올 수 있는 일종의 ‘수집품’으로서의 풍경에 대해 말해준다. 사진의 내용은 특별히 기념비적이거나 스펙터클하지 않은, 그냥 보아서는 어딘지 알기도 어려운(군데 군데 중국어가 쓰여있는 가게 문 등은 예외지만) 그런 골목의 풍경들이다. 여기서 소재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정서이다. 버려진 의자나 부서진 상자 같은 퇴락한 물건들, 빛바랜 간판들은 이곳이 쇠락해가는 곳임을 암시한다.

쇠락해가는 공간으로서 차이나타운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는 작가들 자신의 말처럼 ‘17세기 바니타스 정물 풍으로’ 만든 정물 사진(그리고 똑같은 배치를 그림으로 그린 정물화)에서도 드러난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 시계, 먹다 남은 환타캔과 붉은색 바탕이 있는 흰 목장갑, 종이로 접은 딱지 등은 사실 차이나타운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다 못해 평범 이하의 물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물화는 기묘한 아우라를 갖는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이국정서가 사물을 자체가 가진 특성에 거꾸로 투사된 덕분일 것이다. 요컨대 작가들이 사물을 선택하는 기준은 중국적인 느낌이 나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만약 그런 시각을 택했더라면 이 작업은 이국적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선택한 것은 스펙터클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이 가진 상투성(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을 가진)이다. 쇠락해가는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은 이 공간을 환상공간에서 재창조하고 복원하려는 욕망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정물화’ 혹은 ‘죽은 자연’으로는 그런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의 시선은 상당 부분 연민어린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정물화 만들기’ 작업을 통해 작가들은 소멸과 복원이라는 두 항에 걸쳐 만들어지는 어떤 허구의 공간을 창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실상 하나의 시선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지젝의 설명을 빌리자면, 환상의 진정한 대상은 환상장면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 자신의 시선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이 시선의 힘이 다소 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작업은 개성적이다. 타자의 시선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시선이 가진 어려움은, 그것이 단순히 상투적 모방에 불과한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는 것이다.

- 조선령(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 문화과학 59호, 2009 가을


[큐레이터조선령의상상공장] 풍경의 정물화

장윤주와 김민경은 인천 차이나타운을 답사하면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서 정물화를 만든다. 그림으로도 그리고 사진으로도 찍는다. 조화(造花), 망가진 시계, 중국어가 쓰인 상자, 빈 음료수 깡통 등을 담고 있는 이 정물화에서, 흔하디흔한 물건들은 차이나타운에서만 볼 수 있는 물건들 옆에 있다는 사실 덕분에(그리고 제목 덕분에) 뜻밖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또한 차이나타운 곳곳에서 우리가 흔히 ‘중국적’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들을 사진 찍어 슬라이드로 상영한다. 이들의 이 ‘정물화’는 차이나타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 소비되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타자들을 상투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풍자하고 우리 자신의 얼굴을 되비쳐준다.

- 조선령, 한겨례칼럼, 2009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
김민경 & 장윤주

..2009 여성미술비엔날레의 현장이기도 한 인천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과의 주요 해상 교역로였다. 또한 근대로 들어서면서 오랜 쇄국 정치 끝에 강제로 개항하게 되고 세계 여러 강대국들이 조선에 진출하기 위해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던 지역이었고, 동아시아를 점령하고자 했던 일본이 그 진출을 위한 첫 번째 교두보가 되기도 했다. 차이나타운은 이런 배경을 지니고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독특한 문화적 지형도를 그리며 한국 안의 소수민족의 대표적 거주지가 되었다. 김민경, 장윤주는 동아시아의 세 나라의 중심에 위치한 인천의 항구 부근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이 가진 문화적 특수성과 고립성에 주목한다. 설치작품인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은 이들 두 작가가 차이나타운에서 수집한 오브제들과 두 대의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들은 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차이나타운의 주민들 틈에서 또 다른 타자가 되었으며 소통이 파편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키치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에서 겪게 되는 소통의 문제와 경험을 전하기 위해 일상 속의 사물에 삶에 대한 은유를 부여했던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착안을 했다고 말한다. 수집한 오브제들은 모두 은유의 기호가 되며 슬라이드를 통해 차례차례 드러나는 이미지들은 더 나아가 전시 장소인 새로 꾸며진 인천아트플랫폼이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때 두 작가가 구성한 텍스트는 과거와 현대, 미래와 상호 소통하며 더욱 복잡한 의미를 함의하게 된다.(J. M)


Objects that we brought from In-cheon china town
Kim Min Kyoung & Chang yun ju

..Historically, Incheon, the host city of the 2009 International Women Artists’ Biennale, has been the major international port for trading with China due to its geo-political location. In the modern times, it was the gateway into Korea for the foreign powers and the first city which Japan conquered to spread its powers to East Asia. The China Town succeeds a very unique cultural geography for the minorities in Korea. Kim and Chang focuses on the cultural originality and isolation of the China Town near Incheon Port, the geographical center of three major countries in East Asia. The installation named consists of objects they have collected from the China Town and two slide projectors. The artists made themselves aliens among the alien residents in the China Town and revealed that their communication had to be segmented. In order to share their communication problems and experiences in the China Town, where kitsch culture is produced and consumed, they adopted the Netherlands’ object paintings, which metaphorically used mundane objects to represent life. The objects are used as metaphorical symbols and the images revealed in order by the projectors. Considering that the newly renovated venue of Incheon Art Platform reflect the history of Japanese imperial rule over Korea, the artists’ texts imply a more complicated meaning in a mutual communication with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 인천미술비엔날레 Incheon Women Bienale, 2009

- 강수미, 푸른대양 청춘의개화, 2007